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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어린 한국인 작가에게 지닌 의미

“2024 노벨문학상은 역사의 트라우마에 맞서는 동시에 인간 생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인 산문을 써낸 한국 국적의 작가 한강에게 수여되었습니다.” – 스웨덴 한림원

노벨문학상이 작가 한강에게 수여되었다는 소식이 문학계에 다다르자, 전 세계의 독자들은 거리 곳곳의 서점들로 달려가 소설 채식주의자를 집어 들었다. 노인, 어린아이, 청소년 가릴 것 없이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한강 작가의 진한 소나무 향이 나는 서점 앞을 서성거리며 혹시나 한강이 나타날까 눈을 부리키고 지켜보았다. 한국 각지의 작가들은 대한민국 문학의 무한한 발전을 찬양하며 따뜻한 찻잔을 앞에 두고 한강의 시를 조용히 읊어 내려갔다. 그리고 한국이라는 그리운 고향에서 27,432리 떨어져 지내는 어린 소녀는 방 한구석에서 기쁜 한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드디어!”

한강은 동양인 여성 작가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또한 그녀는 김대중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지 24년 만에 대한민국의 두 번째 노벨상 수상자가 되었다. 그녀는 2018년에 한국 작가 중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녀의 업적을 써 내려가려면 한반도를 가로지르는 물줄기인 한강보다도 긴 종이조각이 필요하겠지만, 한강의 노벨상 수상은 그저 또 하나의 업적에 그치지 않는 상징성을 지닌다. 바로 그녀는 자칫 잊힐 뻔한 한글의 우아함과 사람들의 마음에 척 달라붙어 삶을 뒤집어 놓을 순 있는 글의 힘을 전 세계에 우렁차게 알렸던 것이다.

한국인 작가의 노벨상 수상은 내가 한국어로 글을 쓸 때 가슴에 얹혀있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과 불안함의 응어리를 풀어주었다. 한강 작가는 KBS 다큐와의 인터뷰에서 소설가로서의 삶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소설을 쓴다는 건 조금 더 독자적인… 동시에 고독한 일이죠…그냥 어느 순간 책을 쓰고 싶으면 쓰면 되는 거니까요. 소설이 잘 안되더라도 자기 건강만 조금 해치면 되고 남에게는 피해를 주지 않는 [직업인 것 같아요].” 글은 쓰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관점 또한 이해하는 통찰력을 요하기 때문에 마치 여러 명이서 함께 가파른 산을 등반하는 것과 같다. 작가의 따뜻한 품을 벗어나지 못하는 철없는 글은 읽은 즉시 독자들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고는 한다. 나는 모국어인 한국어로 작필을 할 때면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이 이 끔찍할 정도로 아름다운 언어를 직접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상실감에 빠진다. 글을 쓰고 번역할 때면 “과연 내가 신중히 어루만진 단어 하나하나에 담은 진심이 독자에게 전달되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자주 묻게 된다. 이런 내가 한강 소설들의 번역본이 세상에 끼친 무지막지한 영향에 대해 알게 된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순간 이후로 내 안에 살던 두려움은 꼬리를 감추고 달아나 버렸기 때문이다. 언어의 장벽은 존재하며, 번역본은 원본만큼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는 어렵겠지만 우리가 모두 인간이기에 경험할 수 밖에 없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그 높기만 해 보였던 장벽을 뚫고 전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를 꼽자면, 한강을 세상에 알린 소설 채식주의자는 채식을 하고자 하는 여성 주인공인 영혜로부터 전개된다. 그녀의 결정은 보수적인 한국 사회가 보기에는 하염없이 하찮고 부적절한 결심이어서 결국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다. 작가는 영혜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의 신념과 다름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을 뭇매질하는 사회를 거칠게 비난한다. 영혜를 탓하는 소설 속의 인물들은 인간들은 다 저마다의 독특함을 지닌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결정적인 교훈을 전하는 데에 사실 한글이라는 언어는 도구일 뿐이었다.

작가 한강은 인간의 본질을 세세히 탐구하는 소설에 그치지 않고 고통스러운 한국사를 또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는 이야기 또한 써 내려갔다. 흥이 넘치는 케이팝, 침샘을 자극하는 전통 먹거리들, 그리고 춤사위를 지닌 대한민국에도 사실 어두운 이면이 있다. 이는 바로 일제 강점기와 군정기 등 아픈 민족의 역사를 겪으며 새겨진 흉이다. 한강의 글은 이 흉을 겹겹의 화려한 붕대 밑에서 끄집어내었다. 대표적인 예는 소설 “소년이 온다” 인데, 이 소설은 관찰 대상들에게 관찰자가 될 기회를 쥐여주었다. 5.18 민주화 운동 중 잔인한 군부대의 총 사위에 목숨을 잃은 청년들은 드디어 그들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되었다. 6장으로 이루어진 “소년이 온다”는 여섯 명의 관찰자들의 시점에서 전개된다. 고통이 넘쳐흐르는 역사를 다양한 관점을 통해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독자들은 한국인이기에 지닌 역사적 트라우마에 연고를 바르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비록 한국사를 바탕으로 하였으나 결국은 한국의 국경을 벗어나 상처를 지닌 모든 인간과 나라들에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넨다. 그녀는 이 소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기억은 아물지 않습니다. 시간이 흘러 기억이 흐릿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기억만 남기고 다른 모든 것이 서서히 마모됩니다.”

한강은 나에게 글이 가진 능력을 일깨워주었다. 추억하기 위한 글, 사랑을 위한 글, 이해를 위한 글. 잘 쓰인 글들은 독자들의 심장에 가랑비에 옷 젖듯 천천히 스며들어 결국에는 그들을 더욱더 발전시킨다. 한강의 글은 아프고, 불편하고, 잔인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두려워했던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소설과 시들을 통해 고통이라는 악기로 연주를 하는 본보기를 보이며 한강 작가는 아픈 증상들을 인지하는 것이 낫기 위한 첫 걸음이라는 교훈에 내게 남겨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직도 솔직한 글을 쓰는 것이 망설여질 때가 많다. 혹여나 내 글을 읽고 독자들이 이마를 찌푸리거나 두려움에 몸서리칠까 봐 두려운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나는 이러한 생각에 들 때마다 한강 작가의 용기를 떠올린다. 그러고 나면 글을 쓰기 위해 연필을 꽉 쥔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계속 이야기하고, 드러내고, 때로는 용서할 힘이 쑥쑥 자라나는 것을 생생히 느낀다.

글은 나를 살고 싶게 한다. 내게 나 자신의 경계를 벗어나 세상을 향해 날아갈 날개를 붙여주는 것이 바로 글이다. 나보다 훨씬 성숙한 작가인 한강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두가 살아감을 사랑하게 하려 글을 쓰는 것 같다. 점점 삶을 그림자로 채우려는 세상을 해쳐 나가며 어두운 역사와 밝은 미래를 지닌 한국 작가들은 계속해서 함께 글로 사랑을 써 내려 갈 것이다.

 

Translated by Jeannie Kang